누군가들의 젊은 날이 산소처럼 녹아있는 동네. 부산도시철도 2호선을 지나는 경성대부경대역 부근은 역 이름에 담긴 두 대학 그리고 인근 동명대 상권까지 포괄하며 거대한 젊음의 교차로를 이루는 공간이다. 거리를 지나는 풋풋한 얼굴들 속에서 지난 나의 이십 대를 떠올리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 나는 이 거리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이곳에 서면 과거 속 잊혀졌던 장소들이 떠오른다. 후미진 골목길 사이에 숨어있던 인심 넉넉한 밥집들, 공강이 유독 긴 날 즐겨 찾았던 감성적인 분위기의 카페, 이별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선후배들과 우르르 몰려갔던 값싼 술집들…. 시간이 흘러 이제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곳이 대부분이지만, 그 와중에 용케도 살아남아 씩씩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선 곳들도 있다. ‘나도 잘 지내니까 너도 잘 지내’하고 응원을 건네는 것 마냥. 이 거리를 한 바퀴 걷는 동안 그런 가게들을 몇 곳이나 마주쳤고, 그때마다 오랜 친구라도 만난 듯이 마음이 든든해졌다. 졸업 이후 번듯한 직장에 취업해 이따금 월급 턱을 내러 왔던 고학번 선배들이 왜 그리도 그곳들을 도돌이표 마냥 되풀이 이야기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학기의 시작을 알렸던 건 새내기들의 입학식 그리고 벚꽃이다. 특히 부산에서 유일하게 평지인 부경대 대연캠퍼스는 벚꽃이 흩날리기 시작할 무렵이면 인근 학교 학생들, 직장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벚꽃 명소로 이름 날리며 검색어에 오르내릴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이 동네를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테마는 소극장이다. 부산에서 소극장이 가장 촘촘하게 모여있는 동네. 그건 아마 경성대 연극영화과의 영향일 것이다. 매년 5월이면 <부산국제연극제>가 부산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는 했는데, 이 부근에서는 경성대 내부 소극장을 포함해 용천지랄소극장, 공간소극장, 액터스소극장 등 여러 공간이 참여해 관객들의 문화 수준을 높였다. 그때 관람했던 연극들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독특하고 실험적인 작품 위주로 선택했던 기억만은 선명하다. 청춘은 언제나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증이 있기 마련이니까. 음악을 좋아했던 몇 친구들은 인근 라이브 클럽들을 즐겨 찾았는데, 때때로 티켓 한 장으로 여러 클럽을 옮겨 다니며 공연을 즐기는 행사가 열렸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젊음과 문화가 어울린 동네였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용소로13번길과 수영로334번길이 교차하는 어귀에는 대학가의 멋을 더하는 공간이 있다. 이름하여 문화골목. 요즘 학생들은 이곳을 ‘지브리 스튜디오 감성’이라는 수식어로 설명한다는데 ‘빈티지’, ‘아날로그’ 따위의 단어를 사용했던 나의 어린 시절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것 같아 이질감이 느껴지면서도 재밌다.
문화골목의 시작은 단출했다. 한 건축가가 주택을 매입해 레스토랑 공간을 꾸민 게 시작이었다.


몇 년 후 그는 인접한 주택 네 채를 추가 매입했고 각 공간을 둘러싼 담장을 허물며 본격적인 개·증축에 나섰다. 기존 구조물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진행해 친환경적이면서도 차별화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특징. 내부에는 소극장, LP 바, 독립서점, 카페, 술집 등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각자의 개성을 뽐내면서도 ‘레트로’, ‘빈티지’ 등의 테마로 일관된 색을 유지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아마도 이곳을 최초로 기획했던 최윤식 건축가의 취향일 것이다. 그는 문화골목 조성으로 지난 2008년 <부산다운건축상>을 수상했다.


가을밤엔 음악이 어울린다. 문화골목 2층에 위치한 LP 바 ‘노가다’에는 몇 장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LP가 꽂혀 낭만을 좇는 이들의 발길을 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모아 이렇게나 양이 많아졌다는데 덕분에 옛 시절 음악부터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라는 밴드음악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원하는 노래가 있다면 신청도 가능하다니 이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좋아하는 노래를 공유하는 낭만을 누려보는 건 어떨지.



적당히 선선한 온도에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는 날이면 종종 부산문화회관 방향을 향해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그곳엔 20대의 여린 감수성을 채워주는 공간이 몇 있었는데, 방문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내 문화적 소양도 깊이가 더해졌다.
내 발걸음이 가장 많이 닿았던 곳은 ‘국도예술관’이다. 국내외 다양한 독립영화를 상영해 부산 시네필들이 들락거리던 공간. 실제로 국도예술관은 해운대 시네마테크부산(현 영화의전당), 남포동 씨앤씨와 더불어 부산을 대표하는 독립예술영화관으로 기능했다. 비록 아쉽게도 2018년 1월을 마지막으로 영화관은 영업을 종료했지만, 그곳에서 온 힘을 다해 영화를 보고 서로의 생각을 나눴던 순간들은 여전히 마음에 선명하게 맺혀있다.
사라진 영화관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건 묵직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선 공간들이다. 몇 걸음 거리에 떨어진 부산문화회관과 부산박물관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양질의 공연과 전시로 우리의 일상을 문화의 향기로 물들인다. 두 곳 모두 아름다운 야외정원을 갖추고 있기로도 유명한데 인근 도심 풍경을 조망하고 싶다면 부산문화회관을, 다양한 석조 문화유산이 어울린 산책로를 거닐고 싶다면 부산박물관을 추천한다.


이 여정의 마무리는 마음을 채우는 한 끼다. 근처에 오랜 세월 사랑받으며 승승장구 중인 경양식 레스토랑(모차르트)과 칼국숫집(공원칼국수), 국밥가게(쌍둥이돼지국밥) 등이 즐비해 취향 따라 원하는 메뉴를 선택할 수 있다. 40여 년간 운영되어 온 클래식 음악감상실(필하모니)까지 방문하고 나면 문화로 풍성한 하루가 완성된다.
대연동의 시간은 조금 경건하게 흐른다. 거리에는 ‘UN평화문화특구’가 새겨진 깃발이 나부끼고, 곳곳에 한국전쟁 당시 우리와 함께해준 유엔참전국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우리 근대사의 아픔이 담긴 추모공간 ‘UN기념공원’이 자리하고 있어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우리는 영국, 튀르키예, 캐나다, 호주 등 바다 건너 먼 나라들로부터 전투 병력과 의료단을 지원(파견)받았다. 그 기간 희생된 병력은 약 41,000명. 교과서에서 익히 보았던 이야기들이 공원을 걷는 동안 구체적인 형태로, 슬픔으로 다가온다. 묘역을 지나 마주하게 되는 ‘도은트 수로’는 당시 나이 17세 최연소 안장자의 이름을 따 만들어졌다. 어릴 적 부모님 손 잡고 방문했던 때에는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마음을 파고든다.


공원을 빠져나오면 한국전쟁 참전국 출신 조각가들이 평화를 기원하며 제작한 조각품을 기증받아 조성한 유엔조각공원, 그리고 조금만 더 걸으면 연못을 따라 관목들이 길게 줄지어 선 산책로가 나온다. 끄트머리에 아열대식물체험관, 곤충체험학습장 시설이 있어 종종 견학 온 유치원생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한다. 슬픔이 사라지고 평화가 깃든 풍경을 바라보며 문득 주어진 오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에겐 선물 받은 오늘을 잘 살아낼 의무가 있다.
광활한 자연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진 기분이 된다. 고난에 처한 영화 속 주인공이 산을 찾는 건 어쩌면 그 속에서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를 인식하기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면 머릿속을 잠식했던 고민들이 사라지고 당장의 육체적 힘듦만 생각하게 되니까. 가파른 황령산을 오르던 그때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황령산 정상의 역사는 봉수대에서 시작됐다.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횃불을 피워 국경의 소식을 전하던 군사 목적의 통신시설. 별문제가 없는 날엔 하나를 피웠고 상황이 위급할수록 개수가 더해졌다. 접전이 일어난 급박한 상황엔 최대 5개를 피워올렸다고 하는데 그 불을 올리던 이의 심정은 얼마나 다급했을지. 500여 년 후, 봉수대 옆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송신탑이 설치될 줄 그때의 그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동백섬에서부터 해운대, 광안대교, 부산항부두를 지나 저 멀리 영도까지. 황령산 전망쉼터에 도착하면 바닷길 따라 이어진 부산의 경관이 한눈에 펼쳐진다. 서면, 문현동 등 부산 도심 풍경을 조망하고 싶다면 봉수대 터에서 관람하면 된다. 빌딩숲 도심 뒤로 구봉산, 백양산, 엄광산 등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전망쉼터와는 또 다른 감동을 준다. 황령산 정상은 특히 부산을 대표하는 야경 조망 포인트 중 한 곳으로 꼽히는데, 아름다운 부산의 밤을 감상하기 위해 일부러 늦은 시간 방문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부산의 밤은 바다와 별과 낭만으로 반짝인다.


